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숨 가빴던 2차 미국과 북한의 회담이 아무런 소득 없이 결렬되었다. 비핵화에 대한 양측의 입장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핵은 인류에게 공포다. 원래 핵을 비롯한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고통을 주기 위함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인류에게 보다 편리함과 자연재해로부터의 안전함”을 표방하며 기술이 등장한 것이다. 기술은 실제로 홍수, 가뭄, 폭풍 등의 자연재해로부터 피해를 무수히 줄여 주었고 사람들에게 갖은 안락함을 선사했다. 그런 기술이 배반하였다. 인류가 고도화된 기술 때문에 신음하고 있음이 보여준 것이 이번 회담의 실체가 아니었던가.
이미 수년 전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바둑 대결에서 보았듯이, 기술의 진화가운데 등장한 인공지능은 인간의 통치를 받기보단 인간을 견제하거나 조종하는 위치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발전된 기술은 도시는 물론 본의 아니게 아름다운 농경풍경까지 삭막하게 바꾸어 놓았다. 기술은 인간과 자연을 향해 힘차게 진격(進擊)하고 있다.
이런 기술(技術)의 배반(背反)에 맞설 힘이 인간에게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의 배반에 맞서기가 우리 인간에게는 역부족(力不足)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하기만 한가. 우울해하지 말자. 실망하지 말자. 기술의 배반에 맞설 힘이 여기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백(餘白)의 미학(美學)이다.
복잡한 서류를 잠시 밀쳐놓고 여백의 미를 단아(端雅)하게 드러내는 시(詩)를 펼쳐보자. 봄도 되었으니 봄을 연주하는 서정적(抒情的)인 음악을 듣기도 하고 봄노래도 불러 보자. 복잡한 경제 지표에서 싱그러운 자연으로 눈을 돌려보자. 막장 드라마를 보여주는 방송을 끄고 차분히 인문학 강의도 들어보자.
분주한 채움보다 고요한 비움도 좋아해 보자. 급하게 돌진(突進)하는 세태에 멈춤으로 반격(反擊)해 보자. 가족이 모여도 제 각각 자기 스마트폰을 들고 그것과 교제만 하지 말고 가족이 빙 둘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도 피워보자. 아날로그 시대 때 딱지치기와 고무줄놀이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자녀에게 들려도 주자. “많이 바쁘신가 보아요” 라고 늘 듣는 인사보다 “여유가 있어 보이세요” 라는 뜻밖의 인사도 들어보자.
19세기의 그레고어 멘델은 과학자였다. 또한 그레고어 멘델은 수도사였다. 수도사로의 그의 여백은 과학자로서의 뚜렷한 업적을 만들어 냈다. 그의 과학적 완두콩 유전 연구는 그의 수도사적 묵상과 무관치 않다. 후자가 아니었다면 그의 연구는 인류에게 보편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고 개인적 업적으로 치닫거나 자신의 축재(蓄財)로 만족했을지 모른다. 여백의 미학이 과학을 진정한 과학 되게 하였다.
여백의 미학은 어디서부터 펼쳐졌는가? 안식(安息)이다. 안식은 기술 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안식은 창조 후에 취하신 하나님의 방법이시다. 안식은 자신의 창조를 조망(眺望)하여 즐김이며, 그 창조의 왕 되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안식은 창조를 축복한다. 안식은 창조를 아우르는 힘이다. 원초(原初)적 여백인 안식을 통해 기술의 배반을 꾸짖을 수 있다. 꾸짖을 뿐 아니라 기술이 원래 목표로 했던 인간 섬김으로 되돌릴 수 있다. 여백의 미학, 창조의 안식을 도무지 모르는 자의 손에서 핵 같은 고도의 기술은 점점 더 인류 배반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