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7월15일 1641호 UPDATED 2017-11-07 오후 9:31:12 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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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에제르가 되다
종교개혁과 베레스 웃사 이야기
(사무엘하 6장 1-15절)
김신일 목사
(유니온교회)


이번 주간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을 맞습니다. 전 세계의 성도들이 이를 기념하고 현재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각종 미디어들이 앞 다투어 종교개혁에 관한 기사들과 프로그램들을 싣고 또 방영하며, 인터넷에도 여러 유익한 다큐멘터리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개혁자들에 관한 신간들이 출간되고, 각종 학술제와 포럼들이 개최되며, 의식 있는 교회들 또한 다양한 행사들을 개최합니다.

그 안에 공통점이 하나 있죠? 그때와 지금 우리에게 자리하고 있는 왜곡들에 대한 질타, 뼈를 깎는 자성 요구, 그리고 나름대로의 해결방법과 제안들이 그 주된 내용을 이룹니다. 이 기회들을 잘 선용하여 우리 모두 지속적인 교회 개혁과 갱신을 이끄는 “반추하는 실천가”들이 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작업과 동시에 우리의 내면 또한 갱신하는 작업도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며칠 전 감신대 이덕주 교수님의 강의 영상을 통해 크게 도전 받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내부를 향한 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쓰인 루터의 95개 조항은 우선 자기들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는 거예요. “(루터는)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바른 길인가? 세상을 향해 외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종교개혁은 거대하고 거창하고 웅장한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작은 곳 조용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밖을 향하고 남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내부를 향하고 자신을 향한 운동이었습니다.”
개혁을 말할 때 우리의 내면 또한 반드시 돌아보아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하나님의 궤와 웃사의 죽음
사무엘상 6장에는 성경의 난제 중 하나인 “웃사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지금껏 다윗의 인생은 그런대로 잘 진행되어왔습니다. 기름부음, 골리앗과의 싸움, 사울과의 갈등, 광야 속에서의 고난,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왕위 등극 등등… 우리는 여러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이끌려가는 다윗의 인생을 보며 감탄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야기가 하나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잘못 다루어 죽은 웃사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왕국의 행정수도로 정한 후 다윗은 그 성에 함께 하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하나님의 궤, 법궤였어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 궤는 늘 하나님의 인도와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전진할 때 그 궤는 늘 선두에 섰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이죠. 그들이 멈춰 섰을 때, 그 궤는 중앙에 자리합니다. 그분의 임재입니다. 따라서 통일왕국의 왕 위에 오른 다윗이 그 궤를 찾은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때 그 궤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오래 전 엘리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이끌었을 때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은 무척 암울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의 두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는 패역한 망나니들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은 패배를 거듭하죠. 순간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하나 냅니다. 실로의 성소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가 그 진영의 맨 앞에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하나님의 궤를 앞세우고 나갔다가 이겼던 적이 있지 않았냐? 우리도 한번 해 보자.” 물론 폼은 났을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울리며 하나님의 궤가 맨 앞서 나아가고 그 뒤를 이스라엘의 군대가 따릅니다. 하지만 형식(Form)은 있었지만 의미(Meaning)가 따르지 못했기에 결국 저들 비극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사무엘상 4장은 3만명이 넘게 살육을 당하고 홈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했으며, 설상가상 하나님의 궤마저 빼앗긴 이스라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포기치 않으셨죠. 그 궤가 블레셋 땅에 머무는 7개월 동안 저들의 다곤 신상들이 박살이 났고 많은 이들이 독종으로 죽게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저들은 그 궤를 벧세메스로 돌려보냈고 호기심으로 궤 안을 들여다 본 벧세메스 사람들 또한 죽임을 당합니다. 결국 그 궤는 기랏여아림으로 보내져 이스라엘의 지방 성소, 또는 가정 성소쯤 되는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자,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왕이었던 다윗이 3만명의 무리와 함께 나아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는데, 그 궤를 보관해오던 집의 아들들 웃사와 야효가 새 수레에 그것을 싣고 나옵니다. 곧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가 뛰었고,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든 웃사가 하나님의 치심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행사가 취소되고 진행을 멈춘 하나님의 궤는 오벧에돔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죠.
“그러면 그렇지 무슨 내 주제에…” 낙심한 다윗의 모습이 그 뒤를 따릅니다. 우리는 자연스레 질문합니다. “이해가 잘 안 되네요. 도대체 웃사가 뭘 잘못한 거죠? 아무리 봐도 그가 억울해 보이는데, 하나님 너무 하신 것 아니세요?” 자,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줍니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오늘 이곳의 우리들에게 웃사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하나님의 방법 VS 사람의 방법
우리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웃사 죽음의 첫 번째 이유는 저가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민수기 4장에는 이 법궤를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그 궤는 사람의 손으로 만지면 안 되는 성물이었습니다. 정해진 레위인들만이 그 궤에 부착되어 있는 고리에 막대기를 끼워 운반해야 했어요. 그러나 아비나답 집의 아들들은 새 수레, 즉 당시의 최신 운반기술을 사용하여 이 일을 진행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가장 최신 모델 차량에 그 궤를 넣어 운반한 것입니다. 분명 그것은 투박한 막대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세련된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던 수많은 문제점들이 이와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교회가 의도하고 진행하려 했던 많은 일들이 옳지 않은 방법과 과정들을 통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면죄부 판매, 성직 매매, 십자군 전쟁 등등… 물론 그들의 목적은 교회를 흥왕케 하고 조직을 견고케 하며 멋진 프로젝트들을 잘 진행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문제는 그 목적을 위해 잘못된 수단과 방법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위험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뭔가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은 좀 경시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교회를 키우고 나서 이야기 해”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바른 목적은 바른 방법에 따라 진행되어야 합니다. “영혼 구원”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편법이나 얕은 기술,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동기가 선하지 않은 프로그램들은 절대 금물입니다.
한 영혼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고 한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공동체로 세워지는 것은 정석대로 오랜 수고와 헌신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정하신 방법 즉 기도, 말씀, 순종, 실험, 시행착오, 재헌신… 그것들 외에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지름길은 없습니다. 편법은 없어요. 오직 성경에 나와 있는 방식으로 승부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날 웃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하다가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붙들다 VS 지키다
두 번째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웃사 죽음의 이유는 좀 더 내면적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7절)라고 되어 있는데, NIV 영어성경은 이를 “irrelevant act” 즉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라 표현합니다. 그날 웃사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웃사가 언약궤를 붙들었더니”라고 할 때 그 “붙잡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어 “악하쯔”는 그 안에 소유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이건 내 꺼야”라고 생각하며 붙잡을 때, 그 행위가 곧 “악하쯔”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파생된 명사 “악후짜”가 “기업” 또는 “재산”을 뜻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해요.
그날 웃사는 “어, 우리 집 궤가 떨어지려 하네?” 그렇게 소유권을 의식하며 그것을 붙잡은 것입니다. 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 궤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늘 그의 집에 놓여 있던 물건이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그의 집에 있었어요. 너무 너무 친숙했어요. 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그 궤의 주인인 양 착각하며 손을 내뻗었고 순간 하나님이 그를 치셨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의견은 참고할 만 합니다.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은 웃사가 죽은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력을 발휘했는데, 그 중 반복해서 등장한 한 가지 통찰이 있다. 즉, 주제넘게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려 들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웃사는 하나님을 상자에 넣어 가두고 세상 오물이 묻지 않도록 하나님을 지킬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양 나서는 사람이다. 교계를 살펴보면 저급한 죄인들과 무지한 한 대중들로부터 하나님을 보호하려는 것이 자신의 천명인 줄 알고 사는 남녀들이 끔찍하게 나타난다.”
그렇습니다. 웃사는 하나님이 당연히 자기 것인 양 당연히 자기가 그분을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맨 처음 그 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도착했을 때(삼상 7장), 그 집 아들 엘리아살이 그 궤를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는 웃사가 그것을 “붙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궤를 “지키던” 모습이 어느덧 소유의 의미가 더해진 “붙드는”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고 구원 받았을 때 우리에겐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우리 눈물을 흘렸어요. 그런데 어느덧 이게 너무 익숙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씨름하던 내 믿음의 수고가 어느덧 저기 저 추억의 책가방 속에만 들어있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져서 긴장감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있던 무게중심이 어느덧 내게로 이동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돼. 하나님도 이걸 원하실 거야. 예수 믿는 것 너무 빠지면 골치 아파.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지.” 다 아는 듯 착각합니다. 늘 내가 중심에 서서 중요한 것들을 판단하고 또 결정합니다. 심지어 내 맘대로 교회를 평가하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를 들었다 놨다 하며,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좌지우지하려 합니다. 뭡니까? 웃사입니다. “붙들다”가 바로 그 의미예요. 그날 웃사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하나님의 마지막 선을 넘은 것입니다.



오늘 이곳의 종교개혁, 베레스 웃사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8절). 다윗이 이 상황을 통분히 여기며 그 땅을 “베레스 웃사”라 명명합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이 웃사를 치셨다”는 뜻이죠.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는 이런 웃사와 같은 이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 교회생활, 아니 심지어 목회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힘, 능력, 권위를 절대화 하여 자기가 다 안다고, 심지어 하나님도 자기 생각대로 움직일 것이라 착각하며 이 길을 걷는 이들이 저들입니다. 영혼의 귀함을 무시하고 교회를 존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조차 사라졌습니다. 누구입니까? 오늘의 웃사들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여전히 개혁되는 교회”를 꿈꿉니다. 종교개혁을 반추하고 이를 이끈 영웅들의 용기와 사상과 방법을 공부하며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명제들을 어떻게 현재화 시킬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오늘 이 웃사의 어리석은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들 내면의 씨름도 함께 진행하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걷고 있는 이 믿음과 사역의 여정은 과연 하나님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들을 돌이켜 보겠습니다. 그리고나서 이 “베레스 웃사”의 사건을 내 것 삼기 위해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십니까? “베레스 웃사”는 “페레츠” 즉 “치다”라는 의미와, “우짜” 즉 “힘, 능력, 위엄”이라는 그의 이름 뜻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이 그 날, 자기의 힘과 능력과 위엄을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겼던 이를 치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베레스 웃사”를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게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힘, 능력, 위엄이 있다면 하나님이 충돌하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스스로를 충돌하여 쳐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글 일부를 본 설교의 결론으로 삼습니다. “하나님보다 스스로 더 높아지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말씀보다 자신의 경륜을 더 중시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자기 야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부적이나 장식품으로 이용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진리의 대가가 불이익일까 두려워 진리를 외면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경건의 삶보다 아무도 모르게 욕망의 늪에 침잠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어떤 직책에 있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얕은 꾀, 바르지 못한 방법, 스스로 만든 “웃사”라는 우상들을 먼저 “베레스” 하십시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충돌 그 “베레스 웃사”가 일어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베레스 웃사” 합니다. 그 치열한 씨름이 자리하는 복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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