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7월15일 1641호 UPDATED 2017-07-18 오후 9:31:59 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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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에제르가 되다
29. 전효택 (1877년경-1944년 이후)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전효택은 1877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1906년 30세가량 된 그는 단신으로 도미했다. 그리고 도미한 다음 해인 1907년 말에 그의 이름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베르난디노 카운티 내 레드랜즈에서 나타난다.



북미자지 한인야소교회



1906년 레드랜즈에 한인교회인 ‘북미자지 한인야소교회’가 백인교회인 레드랜즈 제일감리교회의 후원으로 세워진다. 본 백인 교회는 1891년에 흑인교회의 세움을 시작으로 1900년초 스페인 교회와 유니온 한인교회를 세운 바 있었던 ‘선교하는 교회’였다. 북미자지 한인야소교회는 백인교회가 세운 네 번째 교회가 된다. 본 한인교회는 한인 이주자들에게는 예배당 오른쪽 기둥에 세워져 있는 ‘북미자지 한인야소교회’(北美紫地韓人耶蘇敎會)라고 불렸고, 영어권에는 예배당 입구 위에 걸려있는 대로 ‘한인감리교 선교회’(Korean M.E. Mission)로 알려졌다. 북미자지 한인야소교회가 세워지던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등록 교인은 21명이었다.
전효택은 이데이빗, 박창호 그리고 전지영과 더불어 백인교회인 제일감리교회에서 학습을 받은 후 ‘학십인’(학습교인)이 되었다가 1907년 12월 8일 본 교회 담임목사였던 F.M. 라르커 목사의 세례 문답을 받고 세례교인이 된다. 미국에 온 이듬해이고 30세 때다. 1925년 9월에 나성 한인장로교회로 이명가기까지 그는 약 18년간 본 교회의 교인명단에 수록되었다.
다년간 사역하던 이경의 목사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함에 따라 전효택은 1908년 말 북미자지 한인야소교회의 제 2대 목사가 된다. 박창호가 1909년 11월에 목사가 되기까지 전효택은 약 10개월간 목사로 봉직했다.
전효택의 첫 중점 사역은 전임자 이경의 목사에 이어 한인교회의 영구 유지에 있었다. 1909년 이전에 한인교회는 본 교회의 영구 유지를 목적으로 매년 헌금을 하기로 결정하였는데 1909년 1월에도 25명이 헌금한 총 헌금액은 108불이었다. 그 명단과 헌금금액은 아래와 같다:
이경의 5원, 박동규 5원, 안석중 7원, 김창운 6원, 정도만 5원, 차춘택 5원, 조강석 5원, 이무경 5원, 박창호 5원, 전효택 5원, 윤태영 5원, 김히복 5원, 장원국 5원, 황보우 5원, 류재록 5원, 정규만 5원, 이윤오 4원, 최득규 4원, 이영수 4원, 이원길 3원, 박충섭 3원, 안상학 3원, 이운선 2원, 김용호 1원, 이능백 1원.
전효택은 전문인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 자비량 목사였다. 1908년 그는 레드랜즈에서 이무경과 박창호와 더불어 레드랜즈 인근에 7에이커를 빌려 딸기와 감자 그리고 닭을 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듬 해부터는 큰 이익을 볼 것이라는 신문보도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레드랜즈 시내의 “윈저 호텔”에서 취직하고 있었다. 1914년 9월 레드랜즈에서 권업동맹단이 조직되었을 때, 단원은 전효택을 포함하여 33명이었고, 자본금은 3만3천 달러나 되었다. 본 동맹단은 토지를 매수하고 영업을 개시하기 위하여 본 단장인 오 운이 플로리다 지방으로 떠났다.


1905년 4월 공립협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후 그 해 12월에 레드랜즈에도 16명이 발기하여 그 지부가 조직되었다. 전효택도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동족상애, 환란상부, 항일운동에 뛰어 들었다. 1909년 전효택은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통합된 국민회 래들랜드 지방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본 지방회는 국민회 하르빈 지방회의 운영을 목적하여 2불50센트의 기부금을 보냈다. 1909년 2월 레드랜즈에 거주하는 정두만이 신병으로 치료중인데 이곳 동포 20여명이 위문하고 병원비를 연조하였다. 이에 감사하여 정두만이 기부자 이름과 그 금액을 신한민보에 기고했는데 전효택도 있었다. 50센트를 기부하였다.
전효택은 목사로 섬기기 전에도 그의 기부는 있었다. 1908년 5월 유학생 조병진이 학비가 없어서 곤고 막심한 때에 전효택이 1불을 기부하였다. 그 해 8월 공립협회가 발간하는 공립신보사에 전효택도 50센트를 기부하여 래들랜드 찬성회 연금 명단에 포함되고 있다. 그 해 11월 그는 공립신보에 매 삭 50센트를 기부했다. 당시 최고로 기부한 금액은 1불이었다. 1911년 4월에 레드랜즈 국민회 회관을 건립할 때 전효택은 50센트를 기부했다. 1914년 1월에는 국민의무금으로 10불을 기부하였는데 이는 최고액이었다. 1918년 3월 전 레드랜즈 한인교회 목사였던 이경의가 병원에 입원함으로 병원비용 모금에 전효택이 1불을 기부하였다.



로스앤젤레스 한인장로교회



전효택은 1918년경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고, 1920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오클랜드를 거쳐 스탁톤에 거주했다. 전효택의 교회 생활은 기부와 함께 계속되었다. 1921년 3월 전효택은 간도참상 구제를 위해 2불을 기부했고, 그 해 11월에는 국민회에 5불을 기부했다. 1923년 8월에 그는 자신이 경영하던 이스트 9가 835번지의 채소가게를 판다는 광고를 냈다. 그런데 판매의 원인은 뇌병 때문이었다. 머리에 질병이 생긴 듯하다. 그런데 전효택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후에도 채소상점을 경영한다.
1925년 9월, 그는 백인 교회인 레드랜즈 감리교회로부터 나성 한인장로교회로 이명하였다. 1928년 7월 11일부터 18일까지 나성 시내에서 개최한 만국 주일학교 대회에 한국 대표단이 참여하였을 때 이들을 위한 환영회를 구성하고 보조금을 받았는데 전효택이 20불을
기부했다면 그의 교회 생활이 활발했음을 본다.
전효택은 나성한인장로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한다. 그가 1929년 장로로 선임되어 2년간 시무하여 1931년까지 섬겼다. 1935년에 다시 장로로 선임된 전효택은 1943년까지 8년간 시무했는데 1938년의 예배당 건축과 안창호 추모식은 가장 큰 사역으로 꼽힌다. 1947년에 재차 장로로 선임된 그는 익년 1948년까지 2년간 교회를 섬겼다. 그가 나성한인장로교회 장로로 시무한 해수는 총 12년간이다. 그런데 1936년 그가 나성감리교회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황사용 목사와 임성택 전도사와 김필권 전도사 외에 위원으로 전효택 등이 피선된 것이다.

전효택의 문화 명령의 공간은 특별히 국어학교였다. 1928년 6월 김종림의 주선으로 두 국어학교가 대한인 예배당에서 양 국어학교 학부형들이 합동하여 학부형회를 조직하고 새로 임원을 선정할 때 전효택은 서정우와 함께 재무로 피선되었다. 익년 10월에는 자국 정신과 자국 사상을 얻게 할 방침을 연구 실시하기로 하고 2세 국민들이 되도록 아동을 인도하기 위하여 ‘한인아동교육기관 기성 발기위원’을 선출하였는데 나성에서는 전효택도 선임되었다. 1930년 1월 한인아동교육기관 기성발기에 대한 광고에서 그는 김종림 등과 함께 나성 대표 기성위원 중 한 사람으로 열거되기에 이른다.


전효택은 기부를 이어나갔다. 1928년 3월 나성에 사는 이 인이 자살하였을 때 장례비용을 위해 1불을 기부했고, 그 해 8월 이유형이 이대위 목사의 유족 귀국 경비를 모금할 때도 1불을 기부하였으며, 1931년 4월 일본 동경에 있는 한인 기독교 청년회 구제부가 동경에 거주하는 가엾은 한인들과 고학생을 위하여 낡은 옷을 모집할 때 교화운동을 목적으로 구입한 활동사진기계 구입비를 위하여 2불을 기부하였다. 1937년 10월 임시정부 후원금으로 1불을 후원하였는가 하면 이듬해 1월 왜적의 헌쇠 수출 피케팅을 후원하여 의연과 식물을 기부할 때 전효택은 식물을 기부한 자의 명단에 있었고, 1941년 7월에는 멕시코의 맛단사스에 1불의 구제금을 기부했다.
전효택의 슬하에 운용과 운성 등 두 아들을 두었고,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복무했다. 1944년 9월 이들이 휴가를 받아 전효택 가정을 방문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전효택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소천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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