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1월1일 1664호 UPDATED 2018-01-06 오후 7:33:47 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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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에제르가 되다
-8.15 해방 전 한인 선교사
7. 윤병구
윤병구는 1870년 말이나 1880년 초에 서울 또는 경기도 양주에서 윤성형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경까지 우병길로 활동했다. 일찍이 부친을 여윈 그는 숙부 밑에서 성장했고, 배재학당에서 이승만과 함께 공부한 것 같다. 1897년 5월경 한성사범학교 본과 2년제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선교사 통역인으로 활동했다. 윤병구는 본 학교교사 호머 B. 헐버트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고, 1897년 조지 H. 존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99년 2월 존스 선교사의 신학회에서 배웠을 것이다. 본 신학회는 매년 서울과 평양에서 권사와 전도사를 양성하였다. 그는 하와이로 이주하기 전 C. G. 하운셀 선교사와 W. G. 크램 선교사의 조사였고, 개성의 남감리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그는 참된 기독교 복음으로 민족과 사회의 발전을 이루려는 생각을 지녔다.

하와이

윤병구는 1903년 10월 하와이에 도착한다. 그의 부인과 아들은 이듬해 하와이로 왔다. 그는 G. L. 피어슨 감리사와 협력하여 한인들을 전도했고, 피어슨의 후임 J. W. 와드만 감리사의 통역으로 선교활동을 추진했다. 그리고 윤병구는 다른 전도사의 대부분과 같이 지방회 목사 교육반에 적을 두고 1년급으로 홍치범, 현순, 이경직, 민찬호, 김영식과 함께 공부했다. 그는 1906년 호놀룰루교회의 ‘코리안 크리스챤 애드보커트’ 의 편집인을 역임했다. 1906년 5월 윤병구는 하와이 각처 한인교회의 엡워스 청년회 대표들과 함께 엡워스 친목회를 결성하여 한국에 전도인을 두기로 결의했다.

1903년 8월 호놀룰루에서 한인들의 지식 개발과 교육과 상업 촉진 그리고 국권 회복을 위해 신민회가 결성되었을 때, 윤병구는 홍승하 등과 함께 중심인물이었다. 신민회가 이듬해 4월 해산되면서 다음 달 에와친목회가 결성되고 항일운동, 일화(日貨)배척, 동족간의 친목과 권익보호를 목적할 때 윤병구도 동참했다. 1905년 7월 그는 이승만과 함께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러일강화회의에서 한국 독립 보장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그해 11월 상항에 도착하여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이때 주미일본공사 고평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이고 을사조약은 평화스럽게 체결되었다는 망언을 했는데, 윤병구는 12월 15일 상항의 신문기자들을 불러 을사조약은 일본의 창날에서 이루어졌고 보호 논리는 합병의 계책이라고 반박했다. 1906년 5월 윤병구는 호놀룰루에서 국권회복에 대한 한인들의 안목 계발과 지식 도모를 목적으로 ‘시사신보’를 발간했다.

하버드

1906년 가을 윤병구는 하버드대학 문과에 입학하는데 그의 재학 기간은 길지 않았다. 이 무렵 본 대학생 이승만과 교재를 이어갔다. 1908년 윤병구는 이상설 등과 유럽 순방을 하였고 블라디보스톡의 해조신문은 윤병구의 활동상을 치하했다. 그해 7월 북미대한인 애국동지대표회가 덴버의 그레이스감리교회에서 36명이 모여 개최되었을 때 그는 영문서기를 맡았고 개회식에서 ‘동양에 대한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상항

1909년 12월 윤병구가 양주삼에 이어 상항교회에 부임했고, 이때부터 상항교회의 잡지 ‘대도’ 주필을 맡는다. 그해 성탄절에 한인 60여명과 미국인 30여명이 참석하여 성탄을 축하했다. 이듬해 2월 본 교회 청년회는 멕시코 한인교회를 매달 돕기로 결의했는데 그달 황사용의 선교 보고 후 유카탄교회에 30원을 연조하였다. 상항교회가 보조하는 북간도 이화춘의 보고에 따르면 남녀 교우가 4, 5백 명에 이르렀다. 1910년 9월 오화렐 스트리트로 예배당을 옮긴 후 윤병구는 1910년 성탄절 ‘사람다운 사람, 나라다운 나라, 세계다운 세계 건설을 꿈꾸기를 주문했다. 이듬해 2월 이대위가 부임할 때까지 모든 방면에서 전진했고 활력이 넘쳤다고 W. 엑톤 감리사는 그를 회상했다.

이듬해 그는 북미지방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가 만든 ‘한일합방반대를 위한 근고문’을 한인사회에 배포했다. 다음 달 상항 한인들이 합방반대 특별회를 개최할 때 그는 임시의장으로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이때 애국동맹단을 결성하여 그는 외교원으로서 합방반대를 위한 취지서와 청원서를 대한제국과 일본 그리고 대한제국과 외교관계에 있는 9개국에 발송했다. 윤병구는 야학을 열어 영어를 가르쳤고, 60여명의 한인 어린이에게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쳐 민족정신을 각성키 위해 1910년 11월 상항한인교회 내에 대한소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1912년 11월 최정익에 이어 국민회 제2대 중앙총회장이 되어 각 지방의 한인을 순방하여 3·1 독립정신을 북돋웠다.

미국 서부

윤병구는 가족과 함께 1911년 상항을 떠나 오레곤 주로 이주했다가 1914년에는 워싱턴 주로 이주했다. 특별히 워싱턴 주 위니치에서 ‘한인교육회’를 설립해 한인학생들에게 농공 분야의 실용 학문을 장려하였다. 1919년 3월 윤병구는 정인과와 함께 국민회 교섭위원이 되어 각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독립에 대한 동정여론을 일으켰다. 다음 달 이승만과 서재필이 필라델피아에서 주최한 제1차 한인회의가 그를 일본과 미국에 보낼 청원서 작성자의 3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3.1운동 이후 그는 중앙총회장에 재선되면서 김종림과 함께 윤병구가 윌로즈 한인비행학교를 계획했는데 1920년에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에 의해 본 학교가 설립됐다. 이듬 해 그는 김종림, 홍종만 등과 함께 유니온 식산회사를 세우기까지 그의 조국 사랑과 한인 사랑은 남달랐다.

윤병구는 중가주 리들리로 이주하여 250에이커의 땅에 수박농사를 시작했을 때인 1922년, 미국 남감리교 순행목사인 임정구 등과 함께 감리사 윌리암 A. 데이비스 목사의 지도로 리들리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고 파트타임 교역자로 재임한다. 1923년 현재 57명이 출석하였고, 이듬해에는 그 반인 20명이 출석했다. 윤병구는 1925년에 본 교회를 사임했다.

윤병구는 국민회 다뉴바 지방회에서 중앙총회장으로 연설을 하거나 지방외교원으로 활동했고, 1921년 다뉴바한인교회에서 42명의 한인들과 함께 시사연구회를 조직했을 때 회장이 되어 임시정부를 개조하려는 국민대표회를 반대하고 이승만과 임정을 지지했다.

뉴욕

김영섭 목사가 사직한 지 4년 후인 1929년 9월 윤병구는 뉴욕한인교회의 제3대 목회자로 부임하였고, 이듬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당시 뉴욕한인교회는 컬럼비아 대학생 등 유학생 교회였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궁핍했고 1932년과 1933년에 자녀 조와 사라가 사망하면서 1936년에 본 교회를 사임했지만 1939년까지 본 교회에 출석했다.

1931년 11월 뉴욕한인들이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한인의 성명서’를 발표할 때 그 중심이 윤병구였다. 1931년 12월 컬럼비아 한인 대학생들이 미국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재미조선문학회’를 조직할 때도 그는 이사로서 후원했다. 이듬해 2월 국민회 등의 이름으로 일본의 만주침략을 항의하는 결의문을 미국 후버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했는데 그의 동참을 예상할 수 있다. 그는 J. 헤인스 목사와 함께 1934년 뉴욕에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와의 결혼식 주례를 맡을 만큼 이승만과 가까웠다.

가주

윤병구는 나성의 한 조선소에 취직하여 1939년 말경 가족과 함께 나성으로 이사했다. 그는 1946년 4월 리들리한인장로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는다. 1949년 한국에 갈 때까지 나성과 리들리를 왕래하면서 본 교회를 섬겼다. 본 교회는 1936년 신사참배문제로 미국 남감리교와 충돌하자 1939년 미국 북장로교 총회 총무 페인 박사를 초청하여 새 예배당 헌당식을 가진 후 센호킨 노회에 가입하였다.

윤병구는 대동아 전쟁 중 ‘한족출정 군인친족회’를 결성하여 한인 미군들을 후원하였는데 한인의 애국심을 통해 임정 승인과 한국 독립까지 내다봤다. 교회의 영문 잡지 The Star Exponent를 매월 손수 출판하여 미국 사회에 한국을 알리는가 하면 국제연합기구 창설을 위해 57개국이 1945년에 상항에 모였을 때 임정대표단의 교제부장과 재정검사원으로 한국의 형편을 선전했다. 광복이후 그는 나성에서 동지회 북미총회의 선전부장으로서 동지회의 발전과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후원하는데 주력했다.

1949년 3월 윤병구는 한국으로 간다. 외무부와 공보부의 고문에 임명된 그는 해외 한인들을 격려하고 48개 우방국과 친선외교를 펼쳤다. 한미협약의 초안 작성에 몰두하다 6월 20일 아침 소천할 때까지 그는 조국을 사랑했다. 조국은 1949년 6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로 그의 장례식을 치렀고,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해 그의 공적을 선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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