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으로...

빛과 소금으로...

엄규서 목사 (월셔크리스천교회)

LA한인타운에서 1시간반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목회를 하는 선배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선배는 해마다 텃밭을 가꾸어 교인들은 물론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곤 합니다. 상추, 가지, 고추, 호박 등 한국에서 먹던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먹거리입니다. 그것이 부러워 저와 아내도 마당에 열매를 맺을 만한 과일나무를 심었습니다. 마당을 고르고 묘목을 가져다가 심다보니 옛 생각이 났습니다.

30년 전 전라도에서 개척교회를 했을 때 일입니다. 후원을 해주겠다는 든든한 후원자도 있어 그 후원자의 고향인 전라도로 개척을 갔습니다. 낮선 동네에서 그런대로 적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건물을 얻고 사택도 세를 얻어 나름대로 모양을 갖추고 열심히 목회에 정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후원자가 몇 달 동안은 우체국을 통해 후원금을 보내주더니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몇 달을 기다리다 서울에 있는 후원자를 찾아갔습니다. 후원자는 사업이 부도가 나서 행색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모래내시장 한 구석에 조그만한 가게를 얻어 재기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깊은 한숨 속에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엎친데덮친다는 격으로 교회건물 주인에게서 세를 올려야겠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 금액으로는 시내에 예배를 드릴만한 장소를 얻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내에서 돌아앉은 작은 마을에 갔을 때 부동산하시는 분이 한 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태리식 지붕에 방이 3개 있고 넓은 다락방과 넓은 마당이 있는 아담한 집이었습니다. 그 집 주인은 초등학교 교사이신데 경기도로 발령이 났다면서 집을 세놓고 학교사택으로 이사를 가신다고 하면서 하루속히 이사하기를 권하였습니다. 이사를 한 후 몇 날이 안 되어 주인 선생님께서 그 집을 사면 어떻겠냐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전세금은 지불되었으니 나머지 잔금은 차차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집을 얻게 되었습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왔습니다. 심방을 가려니 동네 아낙네들의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땅을 놀리면 안되는데...” 문득 뒷마당이 생각났습니다. 앞마당에는 예배실을 꾸몄지만 뒷마당을 생각하니 풀이 가득자라 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아내와 나는 의논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땅을 놀리면 동네사람들이 욕을 할 터이니 뭐라도 심기로 하자는 것에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생전 처음 밭을 꾸미기란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풀을 뽑고 흙을 뒤집어서 돌을 골랐습니다. 저녁이 돼서야 겨우 일이 끝이 났습니다. 다음 날에는 다른 집 밭으로 견학을 갔습니다. 다른 집 밭은 평평하지 않고 약간 턱을 만들어 그곳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물을 주면 고이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습니다. 우리도 땅에 골을 만들었습니다. 줄을 맞추어 반듯하게 턱을 만들고 보니 이제는 채소를 심으면 되지 싶었습니다. 장날이 되어 시장에 나갔습니다. 아무래도 씨를 심어서 기르면 시간도 많이 걸리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며 시장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싱싱한 쪽파를 보았습니다. “우리 이거 심어요!” “그래 좋은 생각이야!” 아내와 의견이 통하여 쪽파를 샀습니다. 우리 둘 그 누구도 쪽파를 심으면 대파가 될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쪽파를 줄맞추어 심었습니다.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파란 밭이 보기가 좋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밭을 둘러보니 역시 쪽파 심기를 잘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오후 심방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쪽파는 마치 파김치처럼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한심한 우리의 행동에 옆집 아주머니는 할 말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감히 텃밭을 가꾸려는 생각을 버리고 살았는데 과일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식이 풍부해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나 힘든 이민자의 생활 속에 고향의 향수가 묻어나는 먹거리를 나누는 인정 넘치는 삶을 꿈꾸며 과일나무를 심어 봅니다.